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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브리 캐릭터 기요시 호리코시의 침묵 — 시대가 빼앗은 가족의 서사

📑 목차

    〈바람이 분다〉 속 지로의 아버지 기요시 호리코시의 ‘침묵’을 통해,
    전쟁 전후 시대가 가족의 감정과 서사를 어떻게 지워버렸는지를 분석한다.
    그 침묵의 의미를 현대 가족 구조와 연결해 깊이 있게 해석한 글.

     

    〈바람이 분다〉를 이야기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로와 나호코의 사랑,
    혹은 지로의 창조자로서의 고뇌를 먼저 떠올린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는 조용하면서도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는 또 다른 인물이 있다.
    그 인물은 바로 지로의 아버지 기요시 호리코시다.

     

    기요시는 영화 내내 거의 말이 없다.
    감정적으로 개입하지 않고, 아들의 결정에 관여하지 않고,

    모든 장면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있다.
    그러나 그 침묵은 방관이 아니라, 시대가 한 남성에게 강요했던 태도이자

    가족에게조차 나누기 어려웠던 현실의 무게를 담고 있다.

     

    이 글은 기요시 호리코시라는 조용한 인물을 통해
    가족의 서사가 어떻게 시대에 의해 침묵당했는지,
    그리고 그 침묵이 오늘날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되살아나는지 탐구한다.


    지브리 캐릭터 기요시 호리코시의 침묵 — 시대가 빼앗은 가족의 서사

    1. 기요시 호리코시의 침묵 — 시대가 부모에게 강요한 무표정의 서사

    기요시가 거의 말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그 침묵은 단순한 성격적 특징이 아니라, 시대가 아버지에게 요구한 ‘정답 같은 태도’였다.

     

    슈바이처의 말처럼 인간은 상황이 만든 존재인데,

    기요시는 바로 전쟁 전후의 불안하고 낯선 시대가 만든 인물이다.
    그 시대는 남성에게 감정 표현을 허락하지 않았고,
    가족에게 삶의 진실을 설명할 수 있는 언어조차 빼앗았다.

     

    기요시는 아들을 사랑한다.
    그러나 그는 그 사랑을 말로 표현하지 않는다.
    그는 아들의 방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그는 지로의 결정을 막지도, 격려하지도 않는다.
    그는 그저 조용히 존재할 뿐이다.

     

    이 침묵은 무책임이 아니라, 가족을 지키는 방식으로 설계된 시대적 표준이었다.
    “아버지는 말보다 행동으로 말한다”는 말이 있지만,
    그 시대의 아버지는 행동조차 자유롭게 할 수 없었다.

     

    국가가 남성의 노동과 감정, 책임, 젊음을 가져갔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요시의 침묵은 개인의 침묵이 아니라
    시대가 만든 집단적 침묵이다.


    2. 가족을 위한 기요시의 선택 — 침묵을 통해 지켜낸 최소한의 서사

    기요시는 지로의 어린 시절부터 많은 장면을 함께하지만 항상 ‘거리’를 유지한다.
    그 거리는 무관심이 아니라 보호다.

    기요시는 아들이 비행기를 꿈꾸는 모습을 본다.
    그는 그것을 반대하지도, 적극적으로 밀어주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어떤 선택이든 아들의 삶을 완전히 지켜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 시대의 아버지는 아이들이 선택한 길을 끝까지 책임질 수 있는 구조적 조건을 가지지 못했다.
    그렇기에 기요시는 감정적 조언보다 지로가 스스로 결정하도록 공간을 남긴다.

     

    이 침묵은 오늘날에도 익숙한 방식이다.

    많은 부모가 아이의 꿈 앞에서 “응원하고 싶지만 현실이 무섭다”는 감정을 숨긴 채
    그저 조용히 바라본다.

    기요시의 침묵은 바로 그런 태도다.

     

    그는 아들이 원하는 미래를 빼앗고 싶지 않고, 동시에 그 미래가 그를 상처 입힐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말 대신, 지로가 흔들릴 때 기댈 수 있는 최소한의 ‘정적’을 제공한다.

    그 정적은 가족의 사랑이 소리 없는 방식으로 존재하던 그 시대의 대표적 서사다.


    3. 시대의 압력 아래 침묵한 아버지 — 가족과 국가 사이에서 찢어진 기요시

    기요시 호리코시는 전형적인 ‘시대의 손아귀에 놓인 가장’이다.
    그는 가족 안에 있지만, 가족을 위해 사용하는 에너지보다

     

    시대가 요구하는 책임을 위해 더 많은 힘을 써야 한다.

    그는 전쟁에 직접 참여하지 않지만 국가가 만들어낸 전쟁 분위기,

     

    모든 시민에게 부과된 경제적 압박,
    “가족은 스스로 지켜라”는 궤변 속에서 아버지의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

    기요시는 국가와 가족 사이에서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권리를 빼앗긴 인물이다.

    그 침묵은 겁이 아니라 생존이다.
    그 시대의 아버지는 감정적 목소리를 내면 가족이 더 위험해질 가능성이 있었다.

     

    말보다 침묵이 가족을 지키는 방식이었다.

    지금의 시대와 비교하면 부모의 침묵은 오히려 독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기요시가 살던 시대는 침묵이 ‘최선의 보호 전략’이던 역설적 구조를 갖고 있었다.

     

    그는 사랑을 표현하지 않았지만, 가족을 지키기 위해 말없이 버틴 가장이었다.


    4. 지로와 기요시의 거리 — 시대가 만든 가족 간 침묵의 유산

    지로와 기요시는 서로를 사랑하지만, 그 사랑을 확인하는 장면은 거의 없다.
    부자 두 사람은 친밀하지만 동시에 멀고, 가깝지만 또 멀다.

    이 애매한 감정의 거리감은 일부러 만든 구도라기보다

    그 시대의 가족 구조에서 자연스럽게 발생한 현상이다.

     

    그 시대는 아버지와 자식이 ‘감정적으로 가까워질 방법’을 제공하지 않았다.
    대화의 문화도 부족했고, 감정 표현은 ‘사치’로 여겨졌고,
    보편적인 가정에서는 정서적 교류보다 생존이 우선이었다.

     

    지로가 꿈을 좇는 동안 기요시는 그 꿈을 뒤에서 조용히 바라보는 사람이었다.
    그는 아들에게 방해가 되고 싶지 않았고, 동시에 아들의 선택을 전적으로 지지하기에는
    시대적 두려움이 너무 컸다.

    이렇게 두 사람 사이의 ‘조용한 거리’는 현대에도 남아 있다.

     

    많은 사람들이 부모와 직접적으로 대화하지 못한 채 시간만 흘러버리는 구조 속에 있다.
    기요시의 침묵은 바로 그런 현대의 미완성 가족 서사와 닮아 있다.


    5. 가족이 잃어버린 서사 — 침묵으로 인해 기록되지 못한 기요시의 삶

    기요시의 이야기는 영화 안에서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그는 아버지로 존재할 뿐, 한 인간으로서 어떤 꿈과 한계를 가졌는지는 거의 보여주지 않는다.

    이 비어 있는 서사는 ‘시대가 가족 구성원의 서사를 어떻게 지워버리는가’를 보여주는 상징이다.

    전쟁과 경제적 압박은 많은 부모의 꿈, 열망, 개인적 감정을 침묵시켰다.

     

    기요시도 그런 남자였다.
    그는 한때 자신만의 꿈을 가진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대는 그 꿈을 기록하지 않았다.

    기요시가 침묵 속에서 보여준 가족 사랑은 그 자체로 위대한 서사지만,

    시대는 그것을 하나의 문장으로도 남기지 못했다.

     

    이 침묵은 현대의 부모 세대에게도 이어진다.
    많은 부모가 자신의 감정을 말하지 못한 채 가족을 위해 살다가

    정작 자신의 서사를 남기지 못한다.

     

    기요시의 침묵은 “말하지 못한 사람들의 이야기”이자
    “기록되지 못한 가족의 역사”다.


    6. 기요시 호리코시가 남긴 침묵의 의미 — 시대를 초월한 가족의 질문

    기요시의 침묵은 영화 속에서 아무리 작은 존재처럼 보일지라도 그 침묵이 남기는 질문은 결코 작지 않다.

    그는 가족을 사랑했지만 말하지 못했다. 그는 아들을 지켜보고 있었지만 개입하지 못했다.
    그는 삶을 살아냈지만 자신의 삶을 말하지 못했다.

     

    이 침묵은
    “가족이란 무엇인가?”
    “시대는 구성원의 감정을 어떻게 침묵시키는가?”
    “우리는 가족의 서사를 어떻게 기록해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우리에게 남긴다.

     

    오늘날의 우리는 말할 수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그러나 말할 수 있어도 여전히 침묵하는 사람들은 많다.

    기요시의 침묵은 과거의 것이지만, 그 침묵이 남기는 메시지는 현재형이다.

     

    가족의 서사는 시대가 빼앗으면 금방 사라진다.
    그렇기에 지금의 세대는 그 서사를 다시 쓰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기요시가 지로에게 남긴 말 없는 사랑은 한 시대의 비극과 동시에 가족이 끝내 놓지 않으려는 희망의 증거다.